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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키치(kitsch)' 개념

jsoo🩷 2025. 5. 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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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2023)는 동유럽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의 소설과 에세이에서 ‘키치(kitsch)’라는 개념을 철저하게 해부하고 비판한 인물이다. 쿤데라는 특히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과 에세이적 장(章)에서 키치의 본질, 사회적 기능, 그리고 인간 실존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이 글에서는 쿤데라의 키치 개념과 그 문학적·철학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1. 쿤데라의 키치 개념: 본질과 정의

쿤데라에게 키치는 단순히 ‘저급한 예술’이나 ‘싸구려 감상주의’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키치를 “현실의 추하고 고통스러운 측면을 부정하고, 삶의 복잡성과 모순을 감추는 ‘장밋빛 베일’”이라고 정의한다. 즉, 키치는 “똥의 부정(denial of shit)”-즉, 죽음, 고통, 불결, 모순, 불안, 불확실성 등 인간 존재의 어두운 측면을 외면하고, 오로지 아름답고 감상적인 것만을 긍정하는 태도.

쿤데라에 따르면 키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현실의 복합성 부정: 키치는 삶의 복잡함, 모순, 불확실성을 단순화하고, 흑백논리나 감상적 이미지로 대체한다.
  • 집단적 감정의 동원: 키치는 대중의 공감과 동질감을 유도하는 감상적 코드(‘모두가 눈물 흘리는 장면’ 등)를 반복해, 개인을 집단의 감정에 녹여버린다.
  • 절대적 가치의 환상: 키치는 이상화된 사랑, 조국, 가족, 영웅, 순수 등 ‘절대적’이고 ‘아름다운’ 가치를 내세워 현실의 불완전함을 가린다.
  • 자기비판의 결여: 키치는 자기반성이나 아이러니, 비판적 거리를 철저히 배제한다. 쿤데라는 이를 “키치의 제1법칙: 똥의 부정”이라고 표현한다.

2. 키치와 전체주의: 정치적·사회적 맥락

쿤데라는 키치를 단순한 미학적 현상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현실을 만드는 도구”로 파악한다. 그의 경험적 배경-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전체주의 체제와 프라하의 봄 이후의 탄압-는 키치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악용되는지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 전체주의와 키치: 전체주의는 국민 모두가 동일한 감정, 동일한 가치, 동일한 ‘아름다운’ 미래를 믿도록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키치는 ‘공동의 감동’, ‘영웅적 희생’, ‘국가적 이상’ 같은 감상적 이미지를 동원해, 개인의 비판적 사고와 개별성을 말살한다. 쿤데라는 이를 ‘위대한 행진(The Great March)’이라는 은유로 표현한다. “키치는 죽음과 약함, 오물과 모순을 가리는 벽이다. 그 벽 뒤에는 오직 집단의 감동만이 존재한다.”
  • 키치와 개인성의 소멸: 키치는 집단의 감정에 개인을 녹여버림으로써, 개인의 자율성과 비판적 사고를 무력화한다. 쿤데라는 키치를 ‘개인의 죽음’이자 ‘집단적 거짓의 승리’로 본다.

3. 키치와 인간 조건: 영원, 불멸, 욕망

쿤데라는 키치를 “영원에 대한 욕망, 낙원에 대한 향수, 삶의 참을 수 없는 무게를 견디기 위한 자기기만”으로 해석한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 죽음, 상실, 모순을 견디기 힘들어하며, 키치는 이런 실존적 고통을 감상적 이미지로 덮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쿤데라는 『불멸(Immortality)』에서 “키치는 인간이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욕망, 불멸을 꿈꾸는 자기기만”이라고 분석한다.

  • 키치와 ‘homo sentimentalis’: 쿤데라는 현대인을 ‘호모 센티멘탈리스(homo sentimentalis)’, 즉 감상적 인간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절대적 가치로 삼아, 현실의 모순과 불완전함을 외면한다.
  • 키치와 유토피아: 키치는 현실의 복잡성을 단순화하고,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유토피아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는 “모두가 행복한 가족”, “완벽한 조국”, “영원한 사랑” 등으로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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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쿤데라의 키치 비판과 문학적 전략

쿤데라는 키치에 맞서기 위해 소설에서 ‘아이러니’, ‘모호성’, ‘복수의 시점’, ‘자기비판적 거리두기’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 아이러니와 모호성: 쿤데라의 소설은 단순한 감동이나 교훈을 거부하고, 아이러니와 모호성, 다성성(폴리포니)을 통해 현실의 복잡함을 드러낸다. 이는 키치가 ‘절대적 진리’와 ‘감동’을 내세우는 것과 정반대다.
  • 실험적 자아(Experimental Selves): 쿤데라는 소설 속 인물들을 ‘실험적 자아’로 삼아, 각기 다른 가치와 관점을 실험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단일한 감정이나 진리에 빠지지 않고, 현실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게 된다.
  • 개인성의 회복: 쿤데라는 키치가 집단의 감정에 개인을 녹여버리는 것에 맞서, 문학은 “개인의 복잡성, 모순, 불확실성, 고통, 죽음, 오물까지도 인정하는 예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5. 키치의 미학적·사회적 정의: 포스트모던적 관점

쿤데라의 키치론은 포스트모던 이론에서 논의되는 키치의 정의와도 맞닿아 있다.

  • 키치의 미학: 키치는 “미적 대상이나 아이디어를 쉽게 소비 가능한 형태로 환원하는 것”이다. 복잡한 예술적·철학적 내용을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단순화하고, 감상적 코드로 재포장한다.
  • 대중성과 상업성: 키치는 대중적 취향, 상업적 성공, 집단적 감정의 동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최소공배수의 미학”, “흑백논리”, “감정의 동원” 등으로 구체화된다.
  • 비판성의 결여: 키치는 자기비판이나 정치적·비평적 함의를 철저히 배제한다. 오히려 모든 비판적 거리를 제거하고, ‘아름다운 거짓말’만을 반복한다.

6. 쿤데라와 키치의 현대적 의미

쿤데라의 키치론은 오늘날에도 정치적 선동, 상업적 감상주의, SNS의 집단적 감정 동원 등 다양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현대적 비판의 틀을 제공한다. 키치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덮는 ‘아름다운 거짓말’이자, 동시에 누구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조건의 일부다. 쿤데라는 바로 그 점에서,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삶이 키치와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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